와인의 역사

2009. 9. 19. 14:22
포도원의 역사
로마인들은 나르본주변 골(Gaule)지방에 자체내에서 소비가 충분히 되고도 로마인들까지 마실 수 있을 만큼의 포도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포도원을 만들어냈다. 1세기에는 포도재배 역사상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도피네 지방의 촌 사람들이 추운 겨울을 이겨낼 포도나무를 개발해 알로브오지카로 명명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비튀리쥬 비비씨(Bituriges Vibisci - 골 지역의 남부에 살던 사람들)들이 그들의 교역의 유리한 지역적 위치를 감안하여 부르디갈라(Burdigala : 현재 보르도)에 포도원을 건설하여 비투리카(Biturica)라는 강우에 잘 적응하는 새로운 품종을 심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에 포도재배는 골 지방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쎄르브와즈(Cervoise : 고올족이 마시던 맥주)"와 이드로멜(Hydromel : 꿀 음료수의 일종)을 무척 즐겼던 고올족(族)은 포도주를 애호하게 되었고 탁월한 포도재배자가 되었다. 이들이 생산한 포도주는 큰 성공을 거두어 로마의 도미티엥 황제는 자국의 와인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고올 지방에서 재배되는 포도묘목의 50%를 뽑아 버릴 것을 명령했다. 그 후, 프로뷔스 황제가 고올족에게 포도나무 경작권을 완전히 복권시켜서 프랑스의 포도재배 전통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중세기 4세기 초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미사용 와인 수요가 늘어나 포도재배가 확산되었다. 이 현상은 로마제국의 멸망과 해체 후에도 계속되었다. 포도 재배는 수도원 및 교단의 건립과 병행하여 발달되었으며, 특히 베니딕트파 수도사들은 포도 재배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중세시대의 포도 재배지는 프랑스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치의 하나였다. 12세기부터 프랑스 와인은 영국, 플랑드르, 게르만 국가 등을 중심으로 이웃국가들에게 수출되었다. 수도원들은 한편으로는 의식절차의 필요에 의해서, 더 정확히는 그들의 외지의 방문객들을 무료로 유숙시켜야 하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포도재배가 용이한 곳 근처에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시대로부터 대량 운송수단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이미 750 000헥토리터의 보르도 포도주가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이 시대부터 와인 제조는 통제를 받았으며 1395년 필립 르 아르디 왕은 품질을 지키기위한 대책을 세웠다.

와인의 상업화
13-14세기 이래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상업의 발전은 와인 소비를 증가시켰다. 18세기에는 병과 코르크 마개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소비지까지 유통망이 형성되었으며, 동시에 포도재배업자와 전문상인들이 수도승과 귀족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 남서부지역에서 다량으로 생산되는 화이트와인을 증류시켜 '브랑드뱅(Brandevin)' 으로 변형시킨 것을 좋아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드비의 유럽시장이 개척되었고 1세기 후에는 꼬냑과 아르마냑이 출현되었다. 17세기 말엽부터 병과 병마개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자 포도주를 보관하고 운반하는 것이 용이하게 되었다. 운송수단이 아직도 부족하고 너무 느렸기 때문에 19세기에는 각 포도원들이 자신들의 와인을 생산하여 스스로 소비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나, 19세기에는 철도의 가설이 남부 지방 와인의 상업화로의 길을 열어 북부 지방 (일 드 프랑스, 동부..) 와인산지의 쇠퇴를 가져왔다. 남부지방 와인의 상업화로 헤로(Herault) 지방에서만도 1816년에 73,000헥타르였던 포도 재배 면적이 1850년에는 114,000 헥타르로 증가되었다.

포도밭의 시련기
1864년 미국에서 건너온 작은 진딧물인 필록세라(Phylloxera)가 가르(Gard) 지방에서 출현한 후 프랑스 포도밭의 대부분을 괴멸시켰다. 1885년에 전체 수확량은 8천만 헥토리터에서 2천 500만 헥토리터로 급격히 감소한다. 이 재앙은 필록세라에 강한 미국 품종과의 교배 품종에 프랑스 포도 묘목을 접목시킴으로써 저지되었으나 프랑스 포도밭 전체를 재건하여야만 했고 일부 지방은 포도재배를 그만두었다. 필록세라 위기는 와인의 품귀를 가져와 밀수와 가짜 와인이 성행하였다. 1889년 8월 14일자 법령은 이런 부정행위를 막고자 와인에 대해 "신선한 포도나 포도즙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발효시킨 제품"이란 법적 정의를 내렸으며 1905년에는 밀수방지국이 창설되었다. 포도밭 재건 후에는 과잉생산과 가격폭락이 일어나 1907년에는 불경기가 심화되어 "와인의 왕" 마르쓸랭 알베르(Marcelin Albert)가 이끄는 남불 포도 재배자들이 봉기가 일어났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포도밭 일손의 부족으로 수확량이 감소되었으나 곧 다시 회복되었다. 1931년에서 1939년 사이에는 생산량이 급증하여 생산과잉을 가져와 공권력이 개입해야만 했다. 즉 과잉 생산에 대한 벌칙을 가하고 새로운 경작지의 확장을 금지시켰다.

오늘날의 포도원
1935년 INAO(Institut National des Appeliations d'Origine : 전국원산지명칭협회)가 설립된 후, AOC(Appellations d'Origine Controlees : 원산지통제명칭)에 관한 규정이 프랑스의 중요한 와인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협회는 1949년부터 AOVDQS(Appellation d'Origine - Vins Delimites de Qualite Superieure : 원산지 명칭 - 우수품질제한와인)에 관한 규정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1979년에는 ONIVINS(Office National Interprofessionnel des Vins : 전국 와인 동업자 연합회)이 뱅 드 따블(Vins de Table : 여러 종류의 와인을 배합 제조한 와인)과 뱅드 뻬이(Vine de Pays : 산지의 특성을 지닌 와인)에 관한 규정을 책임 관리하게 되었다. 원산지 통제 명칭(AOC)이라는 고급 와인을 보호하는 제도를 도입한다. 같은 시기에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실제적인 과학적 업적을 이루게 된다. 지식의 보편화, 연구방법의 진보등은 포도가 갖고 있는 잠재적 질에 대한 평가를 더욱 향상시키게 되었다. 현대 와인 양조학은 각 지역의 특이한 성질을 표현하며 와인 양조에 진정한 기술의 혁신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움직임속에서 질에 대한 끊임없은 향상을 이루어간 프랑스는 소비자들에게 매우 다양하고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공급하게 되었으며 전세계의 와인 업자들로부터 그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출처 : 금양와인

'와인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와인의 등급  (0) 2009.10.13
와인의 생산 과정  (0) 2009.09.27
와인의 역사 (2)  (0) 2009.09.21
와인이란  (0) 2009.09.19
:
◀ PREV | 1 | ··· | 21 | 22 | 23 | 24 | 25 | NEXT ▶

BLOG main image
by 네버랜드를 꿈꾸는 피터팬

공지사항

카테고리

카테고리 (29)
와인 상식 (5)
시음후기 및 시음회 (0)
스크랩 (13)
이벤트 알림 (8)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달력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Today : Yesterday :